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게나

'나(-ego)라고 인지하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허상)'을 믿는 것은 아닐런지 ?! 본문

생활 속 명상

'나(-ego)라고 인지하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허상)'을 믿는 것은 아닐런지 ?!

boolsee 2010. 1. 20. 08:45
  지난 번 글에서 '나'라는 것이 해체되고 남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http://goo.gl/NHAA). 글의 말미에 '나'를 허상이 아닐까 했는데 왜 허상이라 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기억할 수 있을만큼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도 과연 '나'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기억나시는지요? 저는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탐구를 통해서나 다른 학문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분야도 아니고 그런 탐구 방법이나 진실 해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글의 주제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 라는 중심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나이를 먹고, 지식 창고가 넓어짐에 따라 '나' 도 같이 굳건해져 왔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면, '나' 라고 인지했던 '그 어떤 시기' 이 전에는 순수한 삶의 본능에 의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상태였겠지요. 배 고프면 먹고, 마시고, 졸리면 자고, 생리적 부름에 응답하는 정말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지가 생기기 시작하면 달라지게 됩니다. 다양한 사회 규범이나 생활 양식, 교육 내용과 수준, 주변 환경 등등에 따라서 조금씩 껍데기가 하나씩 들러 붙게되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껍데기는 점점 두꺼워지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와 '나를 둘러싼 것'과 다른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소통이 끊긴 상태, 배움이 중단된 상태로 변하는 겁니다. 늙으면 고집만 남는다는 말이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꺼워진 껍데기를 뚫고, 인간, 아니 만물의 원래의 모습인 '자연의 진정한 모습'으로 나아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눈사람 만들때를 생각해 보지요.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 뭉치를 만들어야 할 때에는 작은 눈 뭉치을 만든 다음, 눈 밭을 오가면서 그 눈뭉치를 계속해서 굴리면 다른 눈이 붙고, 붙여서 큰 눈 뭉치를 만듭니다. 하지만, 기온이 올라서 그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요? 결국에는 '눈의 원래 모습인 자연 상태의 물'로 돌아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눈'이라는 물의 다른 모습이었던 때의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눈은 물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눈'의 실제 모습은 '물'일 뿐이요, 물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지요. 하지만, 물이라는 사실은 잊고서 '눈'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마치 영원할 것 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나' 라는 두꺼운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마음 공부를 하다 보면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좀 더 몀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라고 인지했던 모든 것이 '눈'과 같이 실제로는 진리의 다른 형태일 뿐이요, 봄이 오면 없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덧없이 사라질 '나' 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이고, 무지한 일임을 스스로 깨닫고, 진리(순리)에 맞추어 사는 것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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